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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엿보기

연극을 할 때 느낄 수 있었던 재미 중 한가지는 '엿보기'였습니다.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거죠. 무대 옆에서 막 사이로 보기 때문에 거의 옆모습 밖에 보이지 않고 그나마도 시야가 좁아서 전체를 보기는 힘듭니다. 대사 또한 약간 멀게 들리죠. 그런데 그렇게 보는 재미가 은근히 쏠쏠합니다. 아마도 엿보는 느낌이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도쿄노트는 그런 느낌을 관객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극의 배경이 되는 미술관에서는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미술관의 휴게실에 앉아서 나누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일본어라서 느낌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저 일상어로 조용조용 이야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배우들은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려 하지 않습니다. 얼굴을 보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한 내용도, 행동도 없습니다.  마치 지하철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입니다. 지루하지만 따분한 강연을 듣는 것보단 재밌습니다. 전체적으로 묘한 느낌입니다.

뒷자리에 앉았던 터라 자막이 잘 보이지 않았던 점이 아쉽습니다. 어려운 대사가 나오진 않았지만 두 팀의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던 지라 따라가기가 만만찮더군요. 자막을 보느라 정작 무대를 제대로 보지 못해 안타깝더군요. '엿보기' 컨셉이라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타조와 허경영, 88만원 세대

극의 배경은 도쿄의 한 미술관입니다. 유럽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자 작품의 훼손을 막기 위해 대신 작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미술관이죠. 전쟁을 피해 피난온 미술 작품들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거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잠깐씩 흘러가는 말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아무리 큰 전쟁이라도 당면 하지 않은 전쟁은 일상의 고민보다 결코 무겁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어쩔 수 없는 일'이 돼버렸습니다. 전직 반전운동가가 전쟁으로 인해 피난온 작품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타조는 적이 나타나면 모래 속에 얼굴을 파묻는다죠. 피할 수 없는 현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려버리는 겁니다.(사실 타조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얼굴을 파묻는 거라고 합니다만...)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 말입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현재의 20대들은 취업을 위한 학점과 영어에만 신경쓰기에도 정신이 없습니다. 경험도 취업을 위해 전략적으로 쌓습니다. 촛불집회란 것도 해봤지만 전혀 효력이 없음도 몸소 체험합니다. 여러 가지 중압감에 눌려 바쁘게 살아갑니다. 정신이 워낙 없다보니 반대급부로 여가활동은 생각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까요. 지식은 많지만 똑똑하지는 못하고, 영어점수는 높지만 영어는 못하며, 하는 일은 많지만 열정은 없습니다. 누구의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20대들에겐 영어와 학점에 매달리는 것이 그나마 불안을 덜어내는 행동임에 분명합니다. 딴건 모르겠고 그것만 바라보면 될 것 같은... 그것만 생각하고 싶은... 그런거 말이죠.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허경영에 관한 내용을 방송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상했 듯 실체는 사기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생각보다 진지한 지지자가 많다는 겁니다. 순진한 할아버지 할머니 말고 젊은 세대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생겨남을 인터넷 상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잠시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이고 정치적으론 뛰어난 사람이다, 현재의 대통령보다는 잘할 것 같다는 식입니다.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허황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워낙 현실이 더러우니 사기꾼에게라도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건 아닐까요.

굴곡없이 단편적인 이야기만 오고 가던 극은 끝난 것 같지도 않게 끝이 납니다. 관객들도 한참을 어리둥절해하다가 박수를 쳤습니다. 갑자기 답답해졌습니다. 뭔가 슬프고 씁쓸해졌습니다. 허경영, 88만원세대,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졌지만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그냥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연적인 아픔쯤으로 생각하고 참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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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1 01:20 2009/10/21 01:20


  1. White Rain
    2009/10/21 17:56
    막 사이사이로 보이는 배우들의 모습...지하철에서 마주 앉은, 혹은 주변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는 점...정말 와닿는군요. 그만큼 생동감이 느껴지는 듯 하고 말이죠.
    허망한 희망이라도 꾸고 싶은 욕망.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 나쁜 건 애써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싶은 마음, 꾸고 싶은 꿈만 꾸고 싶은 마음...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힘들수록 여유가 없어지고, 또한 그럴수록 허망한 꿈이라도 꾸고 작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은 현대인들 같습니다. 물질의 이기이죠.
    그래서 저는 요즘, 종교적인 것과 관계없이 산사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답니다. 미래의 언젠가...그곳에서 한줌 햇빛만으로도 행복해 하는 제 자신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저녁 맛있게 드시고, 늘 행복하세요.
  2. basecom
    2009/10/21 18:34
    White Rain님 // 방문해주셔서 감사해요^^; 결국엔 욕심을 버리는 게 가장 행복한 길이 아닐까도 생각해보는데, 그걸 버린다는게 정말 어려운거라서 말이에요..
  3. 초록누리
    2009/10/22 00:46
    앗,,포스팅들 보니 다 제가 관심있는 영화 연극이네요.
    반가워요.
    현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려버린다는 것, 그리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한다는 말이 가슴에 닿네요.
    우리 모두의 비겁한 모습이 아닌가 싶어서...
    좋은 글들 잘 읽고 갑니다.
  4. basecom
    2009/10/22 21:39
    초록누리 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면 한도 끝도 없지만, 어쩌면 그냥 그게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어요. 설득의 심리학 같은 책에서도 인간의 그런 불완전성이 설득에 이용된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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